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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산행/국내여행

해인사 백련암

by 눈사라 2016. 10. 14.


백련암으로 올라가는길


이전부터 백련암에 대한 환상이 남아 있어 그리움으로 가득찼는데 오늘 시간을 내어 행동에 옮겼다

해인사는 수없이 많이 왔지만 백련암을 보지를 못해 항상 동경을 했는데 오늘 그 소원을 이루어 감격적인 시간을 보냈다

세월을 느끼게 만드는 느티나무.



돌계단을 청소하는 스님.

백련암이 보이고


저 멀리 보이는 바위가 경이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입구부터 아름다운 바위가 흥분을 더하고


기와담장의 곡선미가 돋보인다

느티나무가 실제로 보면은 엄청크다

백련암으로 올라가는길.




백련암 경내


경내에 멋진 바위가 자리를 잡고 있다




불면암    부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백련암의 대표하는 아름다운 바위 그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자연만이 창조 할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이 바위에 매료되어 찿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면 볼수록 그 모습이 경이롭다

자연이 만든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백련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암자이다. 해인사 일주문에서 걸어서 약 30분 거리에 있다. 창건자 및 창건연대는 미상이며, 1605년(선조 38)에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제자 소암(昭庵)이 중창하였다. 전설에는 임진왜란 당시 소암이 해인사를 수호하였는데, 왜병들이 소암의 명성을 듣고 해인사 앞의 산마루턱에서 넘겨보았을 뿐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왜병들이 엿보았다는 산마루를 왜규치(倭窺峙)라 부른다. 그 뒤 환적(幻寂)이 이 절에서 수도하였다. 환적은 암자의 동쪽에 토굴을 파서 환적대(幻寂臺)라 이름 짓고, 그 곳에서 오래 좌선하다가 입적하였다고 한다.

늘 한 마리의 호랑이와 벗하였는데 그 호랑이가 제자를 해치자 산신(山神)에게 명하여 다시는 가야산 안으로는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그 뒤 가야산 일대에서는 호랑이의 피해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문하에는 풍계(楓溪)·명등(明登)이 있으며, 특히 시문에 능하여 『유완록(遊翫錄)』·『문집(文集)』 등을 남겼는데 그 각판의 일부가 백련암에 간직되어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전(圓通殿)과 영자당(影子堂) 및 요사(寮舍)가 있는데, 영자당에는 환적·통엽(通嘩)·활해(濶海)·인파(仁坡)·신해(信海)·춘계(春溪)·대송(對松)·월파(月波)·침운(枕雲)·나은(懶隱) 등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또한 원통전은 1687년(숙종 13)환적이 신축하였고 뒤에 응해(應海)가 중건하였다.

해인사의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기이한 바위의 경치와 탁 트인 전망은 가야산의 제1경승지로 손꼽힌다. 암자 좌우로 용각대(龍角臺)·절상대(絶相臺)·환적대·신선대(神仙臺) 등의 기암이 있고, 뜰 안의 불면석(佛面石)은 천연의 한 덩이 거암(巨岩)으로서 마치 불면과 같다고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

예로부터 고승들이 많이 배출된 유명한 수도처로서, 해인총림의 방장 성철(性澈)이 머물렀던 곳이다.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아비라 기도회’가 1년에 네 차례 백련암에서 열린다. 이 기도회는 성불을 위한 모임으로서 범어로 된 기도문을 외운다.



이 보다 더 멋진 조경이 있을까~~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아름다운 소나무와 바위

















                                                                                    성철스님



성철(性徹, 1912년 음력 2월 19일(양력 4월 6일)~1993년 11월 4일)은 대한민국 승려이다.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고 아호는 퇴옹(退翁)이다.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승려이다.[1]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하였다.[1]


생애[편집]

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 ·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과 함께 수행하면서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다.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하였다.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1]

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선문정로》(1981)에 잘 노정되어 있다.[1]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다.[1] 그 후 현재까지 대한민국 불교 철학계의 돈 · 점 논쟁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1] 성철은 지행합일(知行合一) 단계의 지(知)만이 진정한 지(知)이고 지눌 돈오점수는 실제(實際)이고 세부까지 포함한 현실을 좇지 않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表象)에 경도(傾倒)되어 실증성이 희박(稀薄)하게 조직된 이론에 근거한 지(知)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主張)하였다.[1] 그러나 지눌과 성철은 가르침의 대상이 달랐으므로 시비(是非)를 가리기가 어렵다.[1]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서 밝혔고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하였다.[1]

중국 대륙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開宗)한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선종의 내밀(內密)한 특징인 소위 도교에서 영향받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을 교시(敎示)하려는 취지(趣旨)로 한 설법(說法)인,

  •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유명해졌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話頭)는 최초에 미망(迷妄)하는 단계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日常界)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得道)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 화광동진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俗)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判異)하다. 이는 나선형(螺旋形) 성격을 띤 회귀를 뜻한다. 이로 보아 임제(臨濟)의 후예(後裔)인 선사(禪師) 유신(惟信)이 설법한 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공안(公案)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 사상을 그대로 해설한 교시(敎示)이다. 재언하면, 수도자(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이다.

저작[편집]

육조단경(六組檀經)》, 《전등록(傳燈錄)》 등 선문(禪門)의 조사(祖師) 어록을 중심으로 많은 법어를 이루었는데 관념의 도그마(dogma)에[2]빠지지 말 것과 견성(見性)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1993년 해인사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저서로 《돈오입도요문강설》(1986) 등이 있다

















희랑대 뒷산


신기한 바위도 만나고



원당암이 아닐까?

가야산의 아름다운 고봉이 보이고





곳곳에 신기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해인사




지족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암자이다. 원래는 도솔암()이라 불렸다고 하며,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다.

신라 말에 희랑대사()가 이곳에 머물며 최치원()과 시문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 뒤 1893년(고종 30)에 환운()이 중건하면서 도솔천의 의역()인 지족으로 암자명을 개칭하였다. 인법당()과 산신각뿐이던 이 암자에 최근 일타선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증축하여 법당을 비롯, 선원()·요사채 등을 신축하였다.

현재 이곳은 많은 신도들의 불심을 키우는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다. 법당에서 건너다보이는 바위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각자와 함께 희랑대사()가 수도했던 토굴로 전해지는 희랑대가 보인다.


신기한 바위











국일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산내 암자이다.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암자 이름은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에서 유래하나, 대선사가 누구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1637년(조선 인조 15) 벽암() 각성()이 중건하고, 1942년과 1948년 정인()이 중건하였다. 이후 비구니 성원이 40여 년간 불사()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유명하다. 건물로 법당이 있고, 유물로는 부휴() 선수(: 1543∼1615)와 고한() 희언(: 1561∼1647), 각성의 부도 등 3기의 부도가 전한다.



바위와 아름다움 소나무




가을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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