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래실 동산 무심정/모래실 동산 정원만들기

[스크랩] 백자동 이야기 - 모래실 성지

by 눈사라 2012. 6. 28.

● 청송 모래실 성지에 관하여

* 모래실 : 경북 청송군 현서면 백자동 / 을해박해 때 교우촌

* 1801년 서울, 경기지방에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공동체를 형성한 모래실 (경북 청송)

* 백자리에는 지금도 모래실이란 부락이있는데 이는 남몰래 예배를 드리던 밀실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몰래실이었으나 음이변하여 모래실이 되었다.

 

● 1801년 정조대왕이 승하하고 어린임금이 등위하자 김대비(金大妃)가 섭정을 하면서 전국적으로 천주교박해가 극심하여 종교인들은 이곳 백자리에 숨어 살게 되었다. 10년 뒤 갑술년(1814)과 을해년(1815년)은 극심한 기근으로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중 신도들 중 한명이 관가에 밀고하여 그해 부활절(4月5日) 새벽 모래산에서 예배를 보던 수많은 교인들이 학살되고 감금되어 경상도일대 천주교인들은 일망타건 당하여 이사건을 을해박해라고 한다 1801년 신유박해시 백자리에 피난하여 온 오씨성을 가진 신도가 그 당시 천주교황청에서 한국에 최초로 보냈던 독일정부의 금십자가상을 소중히 간직하여 왔으나 15년 후 을해박해시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 모래산 어디인가 묻었다고 하나 함께 순교한 까닭에 찾을 길이 없으며 서기 1975년 로마교황청이 이금십자가상을 찾고자 청송 군수에게 협조 의뢰하였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백자리는 실로 한국기독교의 성지요 유서깊은 고장이다. 그리고 기독교사를 총집대성한 세계기독교사 대백과사전에 백자리 순교사가 조규화씨에 의해 기록되어 있다.

 

 

● 모래산 / 가톨릭백과사전

초기교회 유적지. 모래가 많아 모래실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신유박해(1801년)를 피해 경상도로 넘어온 서울과 충청도 교우들이 정착하여 화전을 일구어 살던 교우촌이었다. 1814년 여름 대홍수로 흉년이 들어 살기가 어려웠는데, 산골에 위치한 교우마을은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아 생활이 윤택하였다. 이 때 경상도 일대를 구걸하면서 돌아다니던 배교자 전지수라는 사람이 모래산 교우촌에서 구걸하는 물자를 넉넉히 주지 않은 데 앙심을 품고 관가에 고발, 모래산 교우마을은 1815년 2월 22일(음) 부활절 날 관헌에 의해 습격당하였다. 많은 교우들이 안동감옥에서 순교했고, 더러는 대구감옥으로 넘어가 순교하기도 하였다. 순교자의 숫자는 정확치 않다. 안동감옥이 초만원을 이뤄 객사가 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기록에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경북 청송군 현서면 백자동에 위치.

 

● 노래산(老萊山) / 두산백과사전

한국에서 조선후기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시대의 천주교 교우촌.

1815년 2월 부활절 축일을 기하여 일어난 을해박해 때 제일 먼저 관헌의 습격으로 신자들이 체포된 천주교 교우촌이다. 《한국천주교회사》 저자인 달레(Ch. Dallet)는 이 곳을 ‘모래산’으로 표기하였기에 청송군 현서면(縣西面) 백자동(栢子洞)의 ‘모래실’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그 원본인 다블뤼(Daveluy) 주교의 〈비망기(備忘記)〉에서 기술된 것처럼 노래산(Noraisan)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곳에서 체포된 사람들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전후하여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은둔하기에 적당한 이곳에 모여 교우촌을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유박해 때 전라도 고산의 저구리골(현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적오리)에서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고성대(高聖大) ·성운(聖云) 형제가 이곳에서 지도자 역할을 하였고, 교우촌이 형성된 뒤에는 경상도 출신으로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상당수 이주해 옴으로써 형세가 늘어났다.

이곳이 발각된 것은 전지수라는 배교자의 밀고 때문인데, 그는 1814년에 큰 흉년이 들자 경상도 여러 곳의 천주교 교우촌을 돌며 구걸을 하다가 신자들을 밀고해 많은 포상금을 얻을 목적으로 포졸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하였다. 이때 노래산 신자들이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이어 진보의 머루산(현 경상북도 봉화군 포산면), 영양의 곧은정(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우련밭(雨蓮田:현 봉화군 재산면)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을해박해(乙亥迫害)이다. 노래산에서 체포된 천주교도들은 모두 40명이었는데, 처음에 경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가 그 중 배교자와 옥사자를 제외한 14명이 대구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이들 중 2명은 다시 배교하여 석방되고, 8명은 훗날 옥사하였으며, 고성대 ·성운 형제와 최성열(崔性悅) ·김화준 등 4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1816년 12월 대구 감영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순교 후 이들 시신은 형장 근처에 매장되었다가 신자들에 의해 이듬해 다른 곳으로 옮겨져 무덤 네 개에 안장되었으나, 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출처 : 백자동이야기
글쓴이 : 마태복음 원글보기
메모 :

                                                            

 

 

                                                                                                                  내고향 모래실

 

                                              을해박해의 그 자리는 우리가 어릴때는 열두덤불이라고 하였는데 그때는 의미도 모르고

                                                    친구들과 소풀을 먹이로 가 그곳에서 신나게 놀던 그런 장소였다.

                                                   교황이 84년도에 우리나라를 방문을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그곳에서 십자가를

                                                   찿으면은 교황이 직접 모래실을 방문을 하고 그곳을 성지로 조성한다고 해 마을에서는

                                                             들떠있었다.

 

                                                             많은 노력을 했지만은 결국은 십자가를 찿지를 못하여 그뒤로 조용해졌다.

                                                             열두덤불이라는 의미도 열두 사람과 관계가 있는것 같다.

                                                             아마도 열두 사람이 희생을 당했겠지...

                                                             지금도 그곳에 가면은 돌이 많은거 같다.

                                                            

                                                             그러고 보면은 우리 마을도 여사 동네가 아니네~~~~~~~~

                                                         

'모래실 동산 무심정 > 모래실 동산 정원만들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름에 나무심기.  (0) 2012.07.25
개복숭아  (0) 2012.06.29
농부의 신분으로..  (0) 2012.05.30
산수유축제와 후두나무심기  (0) 2012.04.14
산수유 나무 심기  (0) 2012.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