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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유럽

이탈리아 ~피렌체,두오모 성당

by 눈사라 2016. 8. 5.




                                                                                                       피렌체 두오모 성당


브루넬레스키의 유명한 돔 지붕이 얹혀 있는, 한때는 세계 최대였던 성당

두오모, 혹은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으나, 축성을 받은 것은 143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다. 1478년 피렌체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라이벌인 피사의 대주교와 교황 식스토 4세가 보낸 이들에게 찔려 숨졌던 것이다. 그의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역시 칼에 찔렸으나, 무사히 몸을 피했고 이후에는 대주교를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오래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부지에 세워진 이 성당의 건축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로 시작하여 여러 건축가들이 맡아 보았다. 1331년 작업을 총괄하기 위한 협회가 창설되었고, 1334년에는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토가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건축가 안드레아 피사노가 조수를 맡았다. 1337년 조토의 사망 후 여러 명의 건축가가 감독을 맡았으며, 원래의 계획을 확장하고 돔을 짓는 쪽으로 설계했다. 1418년 돔을 건축할 디자이너를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발되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는 발판이 필요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돔을 낳았다. 돔은 1436년에 완공되어, 독창적인 걸작으로 남아 있다.









                                                                                       단테의 생가

                                                                          단테



이탈리아 최대의 시인. 장편 서사시 『신곡』을 저술해서 유럽ㆍ라틴 중세의 문학, 철학, 신학, 수사학 등의 전통을 총괄하고, 잇달아 나타난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 피렌체의 소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알리기에로디 베를린, 어머니는 벨라, 조부의 조부 카챠구이다는 제2회 십자군에 가담하여 전사했으며 조부 벨린초네와 아버지 알리기에로는 피렌체와 프라트에서 금융업을 하였다. 단테는 유년시절부터 고전문법과 수사학을 공부하고, 오랫동안 B. 라티니에게 사사받았다. 『신곡』 중에서 단테의 인도자가 된 베르길리우스로 대표 되듯이, 라틴 여러 작가를 규범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문학적 전통이나 아랍세계의 사상도 도입하고, 한편으로는 시칠리아파나 토스카나파 시인들과 실작상의 시법()을 겨누고, 카발칸티(Guido Cavalcanti)와 구이니첼리(Guido Guinizelli)의 영향을 받아서 <사랑>의 시적개념을 전환시켰으며, 『신생』을 저술해서 청신체파의 거부가 되었는데 그 시적계기가 1274년의 베아트리체와의 만남이다.
청년시대의 단테는 피렌체의 시정()에 적극적으로 종사하는 동시에, 정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당시의 북이탈리아는 로마의 교황청과 신성로마황제와의 사이에 끼어 있어서, 자치도시는 게르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으로 갈라지고, 상극을 반복하였다. 피렌체에서는 게르프가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이것이 자립정책을 내건 비안키(백당)와 상업상의 이익에서 교황과 강력하게 결합한 네리(흑당)로 분열하고, 시의 명문 첵키가(백당)와 도나티가(흑당)와의 싸움도 더해서, 치열한 정쟁의 장이 되었다.
단테는 정의의 법령(1293)에 의해서 귀족의 공직취임의 금지가 완화되자, 명목상으로는 의약업 조합에 가입하여 1295년부터 시 행정의 공무에 임하고, 96년부터 97년에 걸쳐서 시뇨리아 직속의 백인위원회의 일원이 되고, 1300년에는 플리오레에까지 지명되었다. 단테는 흑백 양당의 정쟁에서 몸을 빼고자 노력했지만, 곧바로 소용돌이에 말려들어서 백당에 속하였던 단테가 로마교황청에 사자로서 가 있는 사이에 피렌체에서는 흑당이 우세해져, 백당을 쫓아내고 02년 1월, 결석재판인 채로 단테 자신도 시외추방과 벌금형에 처해졌으며 같은 해 3월, 벌금을 지불하러 출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단테는 두 번 다시 고국 피렌체의 땅을 밟지 못하고, 유랑의 반생을 보내고, 망명생활 중에서 『신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베아트리체의 모델이 된 폴코 포르티나리의 딸 비체는 은행가 시모네 드 바르디에 시집가고, 1290년에 타계했다. 또한 단테는 1277년부터 아버지의 뜻으로 약혼자로 정해진 마네트 도나티의 딸 젬마와 95년에 결혼했다. 망명생활의 초기에 단테는 다른 추방된 동지들과 모의해서 피렌체 복귀를 획책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마지막에 단테는 일인일당()을 선언하고, 시인으로서 어려우며 힘든 길을 걸었다. 특히 1310년에 이탈리아에 공격해온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가 13년에 급사한 후에는 고국 피렌체에 돌아갈 희망은 일체 없어졌다. 그래서 북이탈리아의 궁정의 어딘가에 자신과 가족의 안주의 땅을 구하면서, 고난스러운 생활 중에서의 원망과 견신()의 체험에 의거한 혼의 구제를 지옥ㆍ연옥ㆍ천국의 3계의 편력 중에 묘출했다. 미완의 『향연』, 라틴어에 의한 시론인 『속어론()』, 3권의 『제정론』 등, 모두가 망명생활 중에 쓰여졌고, 21년에 라벤나에서 객사했다. 단테의 작품은 정치와 문학의 심한 갈등 중에서 탄생했다.



                                                                                        단테의 동상.


                                                                                                    피렌체 두오모 성당


브루넬레스키의 유명한 돔 지붕이 얹혀 있는, 한때는 세계 최대였던 성당

두오모, 혹은 피렌체 대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바실리카는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에 뒤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성당이다. 그러나 이 바실리카가 처음 지어졌을 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3만 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 피렌체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지배력을 상징하던 곳이었다.

성당을 짓는 작업은 1296년에 시작되었으나, 축성을 받은 것은 1436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화려한 녹색과 붉은색, 흰색의 대리석 파사드, 르네상스 거장들 그림과 조각 작품 컬렉션,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돔 덕분에 명성이 높다. 이곳은 또한 1439년부터 피렌체 의회가 있었으며, 종교 개혁가이자 '허영의 소각'(죄가 된다고 여겼던 사치품과 이교도적인 미술품, 책 등을 공개적으로 불태운 사건)의 주동자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설교를 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이 성당에서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적도 있다. 1478년 피렌체의 공동 통치자였던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라이벌인 피사의 대주교와 교황 식스토 4세가 보낸 이들에게 찔려 숨졌던 것이다. 그의 형이자 공동 통치자였던 '위대한 로렌초' 역시 칼에 찔렸으나, 무사히 몸을 피했고 이후에는 대주교를 목매달아 죽여 버렸다.

오래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부지에 세워진 이 성당의 건축은 아르놀포 디 캄비오로 시작하여 여러 건축가들이 맡아 보았다. 1331년 작업을 총괄하기 위한 협회가 창설되었고, 1334년에는 화가이자 건축가인 조토가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건축가 안드레아 피사노가 조수를 맡았다. 1337년 조토의 사망 후 여러 명의 건축가가 감독을 맡았으며, 원래의 계획을 확장하고 돔을 짓는 쪽으로 설계했다. 1418년 돔을 건축할 디자이너를 찾기 위한 공모전이 열렸다.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선발되었다. 그의 혁신적인 설계는 발판이 필요 없이 스스로 지탱되는 돔을 낳았다. 돔은 1436년에 완공되어, 독창적인 걸작으로 남아 있다.




                                                                                     세레당


                                                                               세레당 천국의문

                                                         기베르티가  28년간 제작기간을 거쳐 만들었다는 대작이라네요


                                                    옆에 있는 문인데 22년이라 걸렸는데 평생을 이 작품을 만드는데 열정을 받쳤네요

























                                                                                                      종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