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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터키

파카도키아 (1)

by 눈사라 2017. 8. 1.


파카도키아


아나톨리아 고원 중앙부 화산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카파도키아 지역은 환상적인 풍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인근 에르제스 산과 하산 산의 분화로 쌓인 화산재를 빗물과 용수가 오랜 세월에 걸쳐 침식해서 마치 버섯이나 첨탑 같은 모습의 기괴한 바위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카파도키아 땅은 푸른색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땅이어서 사람들의 생존을 거부하는 땅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에도 B.C. 1900년 이전부터 터키 공화국이 성립된 1923년까지 몇 차례의 공백기를 제외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다.

이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동굴 속에 지하도시를 건설해서 넓은 생활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에 살았던 기독교 수도자들은 암굴 속에 다양한 벽화들을 남겨놓았다.

비록 불모지대처럼 보이기는 해도 실제로 카파도키아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주변 대지는 농경에 적합했으며, 인근에는 괴레메 계곡과 강의 수원()이 있어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었다.

현재도 카파도키아 주변에는 농사를 생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전 이곳에서 살았던 기독교도들은 주변의 농민들과 교류를 하며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카파도키아를 수놓았던 많은 성당들

카파도키아 유적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기독교도들이 남겨놓은 유적이다. 그들은 괴레메 계곡을 중심으로 바위산 곳곳에 동굴을 뚫어서 수도원과 성당을 건설했으며, 그 내부에 수많은 벽화를 그려놓기도 했다. 현재 남아 있는 종교 벽화의 대부분은 비잔틴 제국(9세기 후반~13세기)1) 시대에 그려진 것이다.

괴레메 계곡 입구 바로 앞에는 카파도키아 최대 규모의 성당인 토칼르 키르셰히르(바르크 성당)가 있다. 입구 가까운 쪽에 있는 것이 구()성당, 안쪽에 있는 것이 신()성당이며, 신성당은 세 개의 예배실로 나눠져 있다. 구성당과 신성당의 벽면에는 그리스도의 일생과 성인들을 소재로 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구성당의 벽화는 10세기 전반 무렵에, 신성당의 벽화는 10세기 후반에 그려진 것이다.

'링고의 성당'이라 불리는 엘마르 키르셰히르에는 구약성서 속에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벽화가, 둥근 천장에는 '전능한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벽화들은 먼저 적색 안료를 사용해서 바위 표면에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십자가를 그린 다음, 그 위에 도료들 덧칠하고, 다시 그 위에 그림을 그렸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엘마르 키르셰히르의 벽화는 파손 정도가 심해서 수리와 복원이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엘마르 키르셰히르 바로 뒤에는 '성녀 바르바라의 성당'이라 불리는 바르바라 키르셰히르가 있다. 성당 내부에는 16세에 순교한 성녀 바르바라 상이 있으며, 벽면에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성 테오도로스가 용과 싸우는 모습을 형상화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외에도 밖에서 빛이 새들어오지 않도록 설계한 '암흑의 성당' 카란르크 키르셰히르를 비롯해 메리에 마나 키르셰히르라 불리는 '성모 마리아 성당' 등 각기 특징 있는 성당이 다수 존재한다.

기독교와 함께 번영을 누렸던 카파도키아

최초로 카파도키아 지역에 정착했던 사람들은 아시리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B.C. 1900년경 교역을 위해 식민지 퀼테페를 건설했다.

그후 B.C. 1600~B.C. 1100년에는 히타이트('하투사스'편 참조)가 아시리아의 뒤를 이어 노예와 광산물을 사고 파는 교역도시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히타이트의 멸망과 함께 카파도키아는 쇠퇴했다.

1세기 전반, 로마 제국 황제 티베리우스(14~37년 재위)는 카파도키아 지역을 수중에 넣고 페르시아와의 국경선으로 정했다.

2세기 후반에는 기독교도들이 포교를 위해 이곳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위험한 종교로 생각해서 신자들을 혹독하게 탄압했다. 신비적인 카파도키아의 광경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인지 이후 4세기 초까지 로마의 탄압을 피해 찾아온 기독교도들이 계속 이 지역에 숨어살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307~337년 재위)가 기독교를 공인하자 카파도키아는 기독교도들의 수행장이 되어 보다 많은 신도들이 몰려들었다.

7세기 후반에 이슬람 교도들이 아나톨리아를 침공하자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많은 피난민들이 카파도키아로 이주해서 당시 인구가 6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렇게 몰려온 사람들은 주거용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바위산을 뚫어 지하도시를 건설했다. 지하도시에는 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 환기용 배기구와 저수조, 식량 저장고 등 인간이 장기간 생존할 수 있는 각종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8~9세기 전반에는 비잔틴 제국에서 일어난 우상파괴 운동2)으로 인해 수많은 초기 벽화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우상파괴 운동에도 불구하고 10세기 무렵에는 동굴 속에 건설된 성당과 수도원의 수가 360개를 넘었으며, 11세기에는 인구가 7만에 육박했다고 한다.

11세기 후반에는 아나톨리아 일대가 터키 셀주크 왕조3)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카파도키아도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지역에서는 이슬람 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 평화적으로 공존했다. 이슬람 교도들의 모스크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건축물이 파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기독교도들은 이 지역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이슬람 세력권이 되었지만 기독교도들은 근근히 신앙을 이어나갔다.

현재 카파도키아는 괴레메 계곡을 중심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곳에서 살고 있는 귀중한 동식물도 보호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가 터키를 생각하면은 가장 먼져 더오르는게 카파도키아가 아닐까

스머프의 배경이 된 신비한 바위들

실제로 보니까 그 특이한 모습에 그져 놀랄뿐이다

그 규모대 대단하고 바위의 크기도 상상 그 이상이구나

협곡으로 올라가 위에서 내려보는 바위는 감동적이면서도 그 높이에서 느끼는 공포감에 다리가 후들들 떨리는구나


이 아름답고 멋진 곳을 짧은 시간에 본다는게 너무나 아쉽구나

시간을 두고 여유있게 트래킹을 하면서 세세히 보면은 더 감동적이고 황홀하겠다

여기 서 있는 순간 그 자체가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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