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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가장 소중한 순간들...

어린시절의 추억

by 눈사라 2010. 8. 11.

 





 

 

우리동네에서 학교까지 갈려면은 십리길이다

그 많은 동네 중에서 백자동 모래실이 가장 학교에서 거리가 멀다

2학년 마칠때까지는 백자분교에서 다니기 때문에 등하교길에 그렇게 부담이 없는데

3학년이 되어 본교를 다니면서 어린나이에 십리길을 다니는것도 공부 만큼이나 어렵고 힘든일이다..

 

그 시절만 하여도 비포장에 진흙길이라 비라도 내리고 눈이 오면은 등학교길이 이중으로

힘들고 불편했다.

그때 동네에는 마을 버스가 다녔는데 낮에 1시경에 도착해 종점인 우리마을에 손님을 내린뒤 다시

면소재지로 내려가 대구 동부정류장으로 갔다.

그리고 저녁이면 학생들을 태우고 우리마을에 도착해 버스가 하루밤을 자고 아침에 7시에 출발을 하여

우리들을 태우고 학교로 가 대구로가는 버스였다 ..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새마을 운동이 한참 진행하던 못 살고 어려운 시절이라

중학교는 거리가 멀어 버스를 타고 등교를 했지만 초등학교는 버스비도 아까워 특별한 일이 아니면

우리들은 걸어서 학교를 등교했다 .

 

우리는 십리길을 걸으면서 등하교를 할려면은 그 거리가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그때 우리들의 학창시절의 친구들과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상 상황이 안 좋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걸어서 등교를 하는데 하교때는 무조건 걸어서

집으로 왔다

그때 하교길에 버스가 지나가면 우리는 반갑게 손을 든다

하교길에는 우리가 버스가 지나면 손을 드는것은 공짜로 좀 태워주세요" 라는 신호다 .

 

우리는 손을 드는게 너무나도 당연했고 혹시나하는 행운를 기대했다

그때 버스기사 아저씨의 마음에 따라 우리를 공짜로 태워주시는 기사분이 계셨고 그냥 지나치는

기사분이 계셨다

 

그 중에 정씨 아저씨가 계셨다 .

그 분은 약간 통통하시고 인상도 넘 좋으시고 하교길에 우리들을 만나면 무조건 태워주셨다

멀리서 정씨 아저씨가 버스를 몰고 오시면 우리들은 기분이 좋아 마구 제자리에서 뛰었다

어느 정도 거리에서 기사 아저씨의 인상착의를 알수있으니 우리가 판단하여

오늘은 공짜로 탈수있는지 판단을 내렸다

 

물론 그냥 지나가는 버스도 많았다

그러면 버스가 오르막을 올라가거나 비포장이라 빨리 못 달릴때 우리는 잽싸게 버스뒤에 매달려

위험한 순간을 곡예를 하면서 즐겼다.

 

한 번씩 버스가 우리들을 무시하고 통과를 하면은 우리는 샘통이나 슬슬 장난기가

발동을 한다

대분분 간단하게 장난을 치는데 버스가 지나가는데 방해를 할려고 큰돌을 주워 도로

중앙에 갔다 놓는다 그때는 버스가 아니고는 차가 별로 다니지 않았기에 버스가 우리마을에 도착해 다시

원점회귀를 하니까 왔던길을 또 다시 오면은 버스는 도로의 장애물로 인하여 기사는 직접 그 돌을 치우는

번거로운 수고를 해야만 했다.

 

물론 우리는 돌을 옮기고 집으로 가 버리기 때문에 그 상황은 한 번도 직접 보지는 못했다

돌을 갔다 놓으면은 그나마 다행인데 가끔 나무 판자에 못을 박아 버스가 지나가는 길에 묻어 두면은

버스가 빵구가 나라고 했다

 

돌을 갔다 놓거나 나무에 못을 박아 놓고서 우리가 직접 확인을 하거나 기사 아저씨가 고생을 하거나

빵구가 난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

다만 우리 짐작으로 빵구가 나거나 돌로 인하여 기사 아저씨가 고생을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

못된짓을 했다.

 

우리의 그런 행동은 자연스럽게 선배들에게 되물림을 받았다 .

그렇다고 자주한건 아니고 초등시절동안 아마도 몇번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을 하면은 얼마나 어리석고 철부지 행동이었는지 깊이 반성을 하는구나

 

70년대에는 보리고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군것질이랑 먹는것이 다양하지않아

등하교길에 배가 고프면 즉석에서 해결을 많이했다 .

그때 많이 먹은것이 찔레라든지 산딸기 가을이면 알밤같은걸로 많이먹고

심지어 길가에 흔한 벼가 익으면은 그것을 입으로 까먹곤했다

잘못 까먹으면 껍질이 입안에 걸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 .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니 버스비가 가정에 부담이 되었겠지.

그렇다고 버스비 때문에 학교에 못다닐 정도는 아니고 될수있는데로 아낄려고

많이들 걸어서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를 면소재지에 다니면서 거리가 멀어 무조건 아침에 일찍일어나

버스를 타하만 등교를 할수있다.

우리마을은 버스가 출발점이라 겨울이면 꼭두 새벽에 일어나 준비를 서둘러야 버스를 탈수 있었다.

버스를 놓치면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아니면 한참을 뛰어 내려가 다른 마을에서 내려오는 늦게오는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은 대부분 학교에 지각을 하거나 땡땡이 치는 날이다...ㅎㅎㅎㅎ

그래도 난 모범생이라 땡땡이는 안쳤지 ㅎㅎㅎㅎ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서도 버스는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중요한 존재였지..

머리가 커 이제는 사춘기가 되면서 버스도 중요했지만 우리에게 더 중요한건 버스가 아니라

버스 안내양 이었다

이쁜 안내양이 오는날이면 우리들은 자동으로 안내양이 머무는 숙소로 놀러가곤 했다

우리마을이 종점이라 그시절에는 버스가 동네에서 자고 아침에 출발을 해 안내양이랑 어울릴 일이 많았다.

 

특히 안내양 숙소에는 우리 여자친구의 집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구에게 놀러를 가면은 안내양이랑

함께 어울려 놀곤 했다

그 날 안내양이랑 놀면서 얼굴도 익히고 친하게 지내면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차비는 공짜였다 ㅎㅎㅎㅎ

그래도 그때는 안내양이 얼굴이 반반한 아가씨들이 많았다 ㅎㅎㅎ

 

우리가 그때 학생이고 졸업을 하면서 시골을 떠나 그것으로 버스와 인연을 끝났지만 시골에 있는 동네 형들은

저녁이면 안내양이랑 어울려 놀았다 .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골인하여 행복하게 잘 사는 동네 형도 있구나


 그리고 한편으로 버스기사와 안내양은 항상 붙어 다니고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을 하기 때문에 24시간 같이 있기 때문에 그때 소문에 기사와 안내양이 바람이 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 시절에 우리는 어리고 그런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요즘 같은 시선으로 보면은 아마도 서로

 좋아할수 있는 여건이 아주 많았다고 볼 수 있겠지

 

 

지금은 세월이 흘러 안내양도 사라지고 버스가  마을에서 자는일도 없어졌지만 그때의 아름다운 추억만은

가슴에 영원히 남아있구나 .

 

지금도 시골에 가면은 옛날처럼 아침 . 점심 . 저녁에 한 번씩 버스가 운행을 하는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우리가 다닐때는 사람들이 많아 버스가 터져나갔는데 지금은 기사분 혼자서 운행을 하는 경우가 더 많구나

그런걸 보면은 세월의 허무함을 느끼는구나

 

다시는 그때의 철부지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 갈수는 없지만 나에게 그런 추억을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난 너무 행복하고 즐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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